밖으로 나가야
기운이 나던 달
가장 낮은 데서 시작해, 문을 열고 나가서 기운을 주워온 달.
숫자로 본 한 달
시간을 적어둔 글은 25편 중 넷뿐이라 그래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빠뜨린 것이 아니라, 8월 초에 “이제 30분 고정으로 쓰니 기록은 그만두자”고 적고 실제로 그만둔 것입니다.
새벽의 흐름
8월은 바닥에서 시작했다. 이틀치 글이 가장 오래 붙든 것은 살아 있어야 할 이유였고, 그 안의 문장들은 여기 옮기지 않는다. 다만 없던 일로 두지도 않는다. 주말 미사에서 몸이 먼저 신호를 보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다가와 살펴 주었다. 그 걱정 어린 얼굴들이 그날의 나를 붙들어 세웠다고 적은 대목이 이 이틀에서 가장 밝은 자리다. 이튿날은 차를 몰아 바다 앞에 멎었고, 파도가 요동쳐도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보며 내가 갈망하는 게 변치 않는 안정감이 아니냐고 물었다.
이 주의 글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 안에 고인 것을 밖으로 꺼내는 쪽으로. 오래 담아둔 말을 처음으로 다 꺼냈고, 꺼내고 나서야 겨우 숨이 쉬어졌다고 적었다. 말하지 않고 견디는 것과 말하고 흔들리는 것 중 무엇이 나은지 묻는 문장이 그대로 남는다. 같은 주에 8월의 첫 새벽 자리가 열렸고, 화면 너머에서 함께 쓰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주 후반에는 먼 길을 다녀왔고, 마지막 날 가까운 분의 부고를 받았다. 꺼내고, 나가고, 그리고 상실 앞에 선 한 주다.
애도는 슬픔이 아니라 못 한 일의 형태로 왔다. 장지까지 가려다 문턱에서 멈췄고, 장례미사에도 가지 못했고, 정기 모임도 빠졌다. 그 못 간 자리들이 이 주 글의 무게 전부다. 죽음을 곁에서 본 뒤로 글은 계속 삶과 죽음의 경계를 맴돌고, 그 사이에 잠은 또 뒤집혀 낮에 자고 밤을 샜다. 주의 끝에서는 처음으로 방향이 바뀐다 — 한 해 동안 해낸 일을 1월부터 하나씩 세어보며, 시간만 보냈다는 생각을 그만두자고 적었다. 스스로를 도닥이는 문장이 이 달에 처음 나온 자리다.
사흘을 쉬고 돌아온 글은 낯설다고 시작한다. 그 낯섦이 오히려 쓰기 자체를 들여다보게 만들어, 비평이란 무엇인가, 왜 내 글은 늘 감상에 머무는가를 묻는다. 동시에 알리는 일의 막막함이 처음으로 정면에 나온다 — 문을 여는 법을 어떻게 다듬어야 사람이 오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며칠에 걸쳐 되풀이된다. 주 후반에는 처음으로 장거리 운전을 감행해 춘천까지 갔고, 밤공기가 가벼워진 것을 피부로 느꼈다. 안으로 파고들던 글이 이 주부터 바깥을 향한다.
마지막 주의 글은 일이 돌아가기 시작한 자리에 서 있다. 새 과정이 열리고, 새벽 자리도 다음 달로 이어졌고, 미뤄둔 안내와 값 정하기를 하나씩 처리한다. 그러면서 실수도 함께 온다 — 오랜만에 선 자리에서 순서를 놓치고 안내를 빼먹은 일을 길게 자책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카뮈의 에세이를 다시 읽으며 이 달의 물음이 한 문장으로 모인다. 아름다운 문장은 기교에서 오지 않고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온다는 것. 죽음 가까이 갔다 돌아온 사람이 한 달 끝에서 삶의 태도를 문장의 조건으로 말한다.
저녁의 결
저녁의 글은 아침의 글과 온도가 다르다. 같은 주 새벽에 자신을 깎아내리던 사람이, 저녁에는 받은 것을 하나씩 세며 감사로 문장을 닫는다. 바닥이던 주에 쓰인 8월 8일의 글마저 그렇다 — 남의 집 밥상 앞에서 배보다 마음이 먼저 찬다고 적었고, 배운 것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었다는 사실에 오래 머문다. 아침 글이 “나는 왜 이 모양인가”로 열린다면, 저녁 글은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었나”로 열린다. 남은 두 편은 긴 이동 뒤에 쓰였는데, 몸의 통증은 정직하게 적으면서도 끝은 뿌듯함이다.
새벽이 남긴 문장들
“고요히 숨 죽인 바다. 하지만 푸르고,
반짝이는 해수면은 아름답기만 했다.”
“너른 창이 있어 눈만 뜨면 천연이 내게 쏟아진다.”
“나의 시선을 뺏는 것에서 자연이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걸 지금에야 깨닫는다.”
“삶의 무게와 죽음의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화면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렇게 힘이 된다니.”
“이렇게 한 계절이 가고 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새 그릇에서 새롭게 배운 것들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며 비워 나갈 거다.”
“의식하는 게 구속 같다가도,
의식함으로써 힘을 얻기도 한다.”
이 달의 결
8월은 가장 낮은 데서 시작해 ‘태도’라는 말로 닫힌 달이다. 이 달의 글을 꿰는 실은 하나다 — 기운이 안에서 나지 않았고, 밖에서 왔다. 자리를 지켜준 것은 화면 너머에서 함께 쓰는 사람들, 성당에서 마주치던 사람들, 먼 길을 함께 간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 달의 회복은 안으로 파고들어 얻은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나가서 주워온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글이 그 회복을 스스로 의심한다 — 밖에서 반짝이는 것은 우울을 감추느라 쓴 힘이고, 그러고 나면 몸살처럼 앓는다고 적는다. 회복과 연기가 한 몸이라는 이 물음이 8월에 열렸고, 닫히지 않았다. 마지막 날의 글이 답 대신 방향을 준다 — 문장이 아름다워지는 조건은 기교가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
이 달의 씨앗
기운은 밖에서 왔다
이 달의 회복은 안으로 파고들어 얻은 것이 아니다. 함께 쓰는 화면 앞에서, 먼 길 위에서, 낯선 자리에서 건져 왔다. 「역시 나는 밖으로 돌아야 기운이 난다」는 문장이 8월 하순에 그대로 적혀 있다. 안에서 나지 않는 기운을 밖에서 구하는 것이 회피인지 방법인지, 다음 달에 다시 볼 자리다.
밖에서 반짝일 때, 그것은 회복인가 연기인가 — 8월 말의 글에 이 달에서 가장 뒤집힌 문장이 있다. 밖에 나가면 우울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그것은 나아져서가 아니라 감추느라 애쓴 결과이고, 그러고 나면 몸살처럼 앓는다는 것. 그런데 같은 글이 곧바로 되묻는다 — 그렇게라도 기분 좋은 척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연기가 회복의 반대인지 회복의 방법인지, 이 달은 답하지 않고 물음만 남겼다.
나만의 문장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기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삶에 대한 태도, 나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 마음이 중요하다.— 8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