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그대로 있어
한 주 내내 원인을 찾아 뒤를 돌아보던 사람이, 목요일에야 방향을 바꿨다. 억지로 떠오르는 대신 가라앉음을 허락하는 쪽으로. 흔들린 믿음과 잠 못 이룬 밤이 나란히 놓인 한 주였다.
새벽의 흐름
무료함으로 한 주가 열렸다. 기쁨의 유통기한이 하루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 토요일의 기쁨이 일요일엔 이미 퇴색해 있었다는 것 — 을 담담히 적었다. 그리고 이 주 전체를 예고하는 문장이 여기 있었다. "나는 자꾸만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원인을 알면 이 감정을 바꿀 수나 있을 것처럼."
진료실에서 들은 한마디가 이 주의 중심 사건이 되었다. 의식을 내려놓고 쓰는 글은 본모습이 아니라는 말. 그 말을 그냥 받아들이지도, 그냥 밀어내지도 않고 다른 곳에 다시 물어 다른 답을 얻었지만 "완전히 안심되지는 않았다"고 썼다. 흔들림이라기보다 검증에 가까운 하루였다. 같은 날 꿈에는 얼굴을 다 덮는 가면 같은 안경이 나왔다.
아침은 "방학이다. 신나는 방학~"이라는 설렘으로 열렸다. 그러나 "누가 나를 구해주지?"라는 물음이 곧 따라붙었고, 같은 문단 안에서 스스로 답했다. "결국엔 나 스스로 떠올라야 한다." 밤에 다시 쓴 글은 이 주에서 가장 깊이 내려간 자리였다. 그 어둠 안에서도 밥을 차려준 아이에게 고맙다는 문장으로 하루를 맺었다.
전환이 왔다. 억지로 밝아지는 방식이 아니라 가라앉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몽롱쓰기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것인데, 브레이크가 생겨버렸다"고 적으면서도, 화면 너머 같이 쓰고 있는 이의 손을 보며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이 주에서 가장 오래 쓴 날이자, 목소리가 스스로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날이다.
한 주 내내 원인을 뒤지던 사람이 마침내 몸에서 답 하나를 건졌다. 잠.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잠 오는 느낌!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졸려서 어질어질하는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안도가 문장마다 배어 있는 아침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거의 자지 못했다." 회복이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는 걸 이 두 편이 나란히 보여준다. 못 잔 채로 먼 길을 나서는 아침이었지만, 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 잠을 구하는 조용한 기도였다.
새벽이 남긴 문장들
"모른다는 것이 늘 불안하다.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꾸만 원인을 찾으려 뒤돌아보는 나.
나는 앞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진다."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몽롱쓰기에서마저
나는 생각의 고삐에 당겨져 멈추게 되었다."
"어쨌든 지금은 침잠의 시기라는 걸 받아들여야겠다.
인정하고 나면 떠오를지 모른다.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받아들여주자."
"억지로 부양하려는 마음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야.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를 의식한 거지.
그러니 지금은 그대로 있어."
"배고프다는 감각이 느껴지는 걸 보니 살아있네."
"이렇게 편해지다니!"
이번 주 결
이번 주의 씨앗
잘 보려고 쓴 것이 시야를 가릴 때 —
버리지 않고 깎아서 쓰기로 했다
화요일 꿈의 안경이 이 주에서 가장 밀도 높은 이미지였다. 잘 읽고 싶어 고른 것인데 얼굴을 다 덮는 가면 같았고, 무거웠고, 결국 읽고 쓸 수가 없어 하루도 못 되어 깎으러 갔다. 같은 주 월요일에 적어둔 문장 — 본래의 나와 타인이 보는 나의 격차가 크다는 것은 사회적 페르소나가 제대로 기능한다는 증거일지 모른다는 — 과 나란히 놓아보면, 두 글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깎아서 쓰기로 했다.
하나 더. "억지로 부양하려는 마음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야" — 이 문장 하나로도 짧은 글 한 편이 된다. 회복이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는 것을 허락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이야기. 내가 늘 쓰던 "돌멩이를 건진다"는 말과도 이어진다. 가라앉지 않으면 바닥에 손이 닿지 않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그대로 있어.— 260723 목요일 새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