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 입은 절제를
벗은 달
오래 닮고 싶었던 작가들의 절제를 문체의 정답으로 여겨왔다. 6월 10일, 처음으로 그게 아니라고 적었다. 존경하는 것과 그 문체로 써야 하는 것은 다르다고. 달의 끝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갔다 — 나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열여덟 날의 새벽에 열아홉 편이 남았다.
숫자로 본 한 달
그래프의 수치 가운데 편수와 기록한 날은 실제 값이고, 감정 점수·주제 비중·키워드 비율은 글을 읽으며 매긴 해석입니다. 흐름을 보는 참고로 읽어주세요. 감정은 날짜별로 그리면 특정한 하루를 지목하게 되어, 주 단위로 묶어 그렸습니다.
새벽의 흐름
귀로 시작하는 주다. 밤새 내린 비, 젖은 도로를 달리는 큰 차들, 멀리서 울려 퍼지는 까악까악. "아침부터 삶으로 가득 찬 소리에 싸여 있다"고 적는다. 같은 주에 두꺼운 책 한 권을 펼쳤다. 이천 페이지가 넘는 숫자를 보고 기함하면서도 서문을 읽고는 흥미가 생겼다고 쓴다. 하루에 두 편을 쓴 날도 이 주에 있다 — 한 번 앉아 다 못 꺼낸 말이 있어서.
이 달에서 가장 중요한 주다. 화요일에는 꿈을 붙들고 마흔아홉 분을 썼다 — 이 달 최장이다. 버스와 시험지, 0을 가운데 둔 숫자 9와 8. 무의식이 왜 하필 그 숫자를 골랐는지 되짚는다. 그리고 수요일, 문체에 대한 문장이 나온다. 오래 닮고 싶었던 작가들의 절제를 정답처럼 여겨왔는데, 존경하는 것과 그 문체로 써야 하는 것은 다르다고 처음으로 적었다. 같은 주에 다른 걱정도 함께 올라온다 — 도구에 기대며 생각하는 힘이 무뎌지는 건 아닐까 하는.
자제력을 캐물은 주다. 고전 토론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실마리였다 — 사람은 왜 세 번을 시도하고 네 번째에야 뜻을 이루는가, 그 반복이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모습과 닮았다는 말. 거기에 "저는 잠이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적는다. 자야 할 시간에 재미있는 것을 놓지 못하는 습관을 게으름이 아니라 자제력의 문제로 처음 이름 붙인 자리다.
같은 글에서 문장 공부도 한다. 한 문장 안에 무게와 온도와 색깔을 다 넣고도 짧게 느껴지는 서사시의 문체를 보고, 부연 없이 필수만 채우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렇게 닫는다 — 창작의 샘이 말라 있으니 작은 옹달샘에서 시작해 커다란 호수를 만들자고.
이 달에서 가장 깊이 내려간 주다. 가족 안에서 들은 한마디에 오래 눌러둔 자리가 흔들렸고, 그 흔들림을 따라가다 이 달 처음으로 오래된 이야기를 길게 꺼냈다. 목요일과 금요일의 글은 눈에 띄게 흐트러져 있다. 잠이 모자란 날의 문장은 문법이 무너지고, 꿈과 현실과 어제 본 화면이 한 문단 안에 뒤엉킨다.
그 며칠의 글은 여기 옮기지 않는다. 다만 없던 일로 두지도 않는다. 이런 시기가 있었다는 것까지가 이 달의 기록이다.
그 주에도 다섯 편을 썼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주간 계획의 유익"이라는 제목의 글이 하나 끼어 있다 — 가장 흐트러진 주에 가장 정돈된 이야기를 썼다.
달의 마지막 이틀에 방향이 바뀐다. 새벽을 함께 쓰는 분이 한 분 더 들어오신 아침, "혼자 쓰는 시간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적는다. 그리고 그 성실함을 두꺼운 책 속의 거북이에 빗댄다 — 느리지만 한 발 먼저 가 있어서, 아무리 빠른 발도 끝내 따라잡지 못하는.
같은 글의 끝에서 6월 10일의 문장이 한 번 더, 이번엔 더 단순하게 돌아온다. 나는 본투비 수다쟁이인가 보다. 하나의 글 안에 여러 주제를 담는 것이 내 글의 특징이니까 — 결점을 고백하던 자리에서 특징을 진술하는 자리로, 말이 옮겨 앉았다.
저녁의 결
이 달의 마지막 이틀에 저녁 글이 처음 시작됐다. 첫 글은 낮에 있었던 발표 이야기다. 늘 하던 것인데 이상하리만치 떨렸다고 적고, 왜 그랬을까 되짚다가 답을 찾는다 — 돈을 받는 일이라서. "누군가의 돈을 받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내 안의 검열관이 켜진다." 그러고는 자기 첫 영상 제목을 스스로에게 되뇐다. 초고로 시작하기.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오늘은 별로 한 게 없다"로 시작하는데, 실은 하나를 크게 바꾼 날이다. 만들어 둔 일정 도구를 주간에서 월간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일정을 보여주기만 하던 것을 나눈 분량을 다 읽으면 표시할 수 있게 고쳤고, 매일 하는 것들은 한눈에 보이는 형태로 다시 짰다. 아침 글이 문체의 방향을 바꾼 달에, 저녁 글은 살림의 방향을 바꿨다.
새벽이 남긴 문장들
"내 무의식이 표현한 숫자 9와 8.
어떻게 꿈이 만들어지는 걸까?"
"클레이 키건과, 아니 에르노, 필립 베송은
내가 닮고 싶은 존경하는 작가들이지
내가 그 문체로 써야 하는 건 아니다."
"작은 옹달샘에서 시작해서 커다란 호수를 만들자.
그리고 생각을 하며 살자. 내 마음의 언어를 찾자."
"서로의 자리에서 불을 밝히고
저마다의 시간을 쓰는 이들."
"느리지만 한 발 먼저 앞선 거북이와,
영원히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아킬레스."
"좋아서. 좋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삶의 많은 것들을 결정했다."
이 달의 결
이 달의 씨앗
고치려던 것이
고유한 것이었다
오래 절제를 목표로 삼아왔다. 한 문장에 하나만 담고,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고, 덜어낼 수 있는 만큼 덜어내는 글. 존경하는 작가들이 그렇게 썼으니 나도 그리로 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6월 10일 글에서 그 믿음이 처음 갈라진다 — 닮고 싶은 것과 그 문체로 써야 하는 것은 다르다. 스무 날 뒤에는 같은 말이 훨씬 담백해진다. 나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눈여겨볼 것은 진단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 편의 글에 여러 주제가 튀어 오른다는 관찰은 그대로다. 바뀐 것은 그 관찰 뒤에 붙는 말이다. 6월 이전에는 "그래서 고쳐야 한다"였고, 6월 이후에는 "그래서 이게 내 글이다"가 되었다. 같은 사실에 다른 문장을 붙이는 일 — 그게 이 달에 일어난 전부이고, 그래서 이 달이 분기점이다.
다만 아직 남은 자리가 있다. 절제를 벗은 다음에 무엇을 입을 것인지는 이 달에 정해지지 않았다. 같은 글에서 "보여주는 글쓰기"를 부러워하고, 사흘 뒤에는 부연 없이 쓰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적는다. 절제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방식으로 다시 배합하는 일 — 이 달이 다음 달에 넘긴 숙제다.
나는 본투비 수다쟁이인가 보다.
하나의 글 안에 여러 주제의 글을 쓰는 게
내 몽롱쓰기의 특징이니까.— 260630 화요일 새벽에